설교말씀

너희는 겸비하라

역대하 7장 14절

1. 서론

시편 46편 10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말씀을 순종하는 백성은 뭇나라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성경에서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는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께서 높이신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취임사중에서 성경말씀을 읽습니다. 오바마대통령이 읽은 말씀이 역대하7장14절 말씀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미국은 911테러와 모기지론 부동산 거품때문에 경제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바마대통령은 "국가 조찬기도회"를 폐지하고  "동성애자의 날"을 선포하여 백악관에 동성애자 250명을 초대하고 격려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 나라가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입법화하려고 합니다. 소수차별은 성경에서도 금하고 있는 사항입니다. 문제는 이곳에 "동성과 그 성적취향을 인정하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나라와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때입니다.

2. 본론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스스로 낮추고(겸비하고)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그 땅을 고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경기가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주변도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것 같습니다.
이때 역대하7:14절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너희가 스스로 낮추고 내얼굴을 찾으면 내가 그땅을 고칠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오바마대통령은  이 성경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지만 우리가 따른다면 이 땅이 고쳐질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스스로 낮추다"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에 굴복하여 자기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땅이 고쳐지려면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하다"라는 단어의 뜻은 " 뿌리다"에서 왔습니다. 이는 바로 구약의 제사장들이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은 이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을때 그 땅이 고쳐지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역대하7장11절에는 솔로몬이 성전낙성식이 끝나고 솔로몬에게 나타납니다.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들을 경배하면 내가 너희에게 준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와 부를 한꺼번에 받고 이스라엘 역사상에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왕이 됩니다. 하지만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솔로몬왕은 바로의 딸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여인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돈은 바알과 함께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만든 아세라 우상을 섬긴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결국은 우상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그 자리에서 뽑혀 바벨론으로 앗수르로 끌려갑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성경말씀은 우리의 본보기를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거룩한 백성이 된다면 언제나 그 삶은 견고하며  승리하게 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3. 결론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나라에서는 하나님말씀에 불순종하는 법규를 만드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겸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받고 이 땅이 고침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의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귀울이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늘 우리가 겸비하고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끊임없이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민수기 13장 25절~-33절

1. 서론

요즘 코로나사태로 인해서 정부가 두번째나 예배에 대한 규제를 발표했습니다.  중식금지, 소그룹모임 금지 등입니다. 교회는 성령하나님의 성도들간의 교통하심으로 일하십니다. 이번 코로나로 인해서 온라인 예배를 찬성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은 신앙생활의 나태함으로 교회의 어려움으로, 결국은 성도의 어려움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땅의 열두정탐꾼을 보내고 그들이 돌아와서 발생하는 믿음의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간 정탐꾼이나 이세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나 필요한것이 "현실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2. 본론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은 그곳에 과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그곳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 성읍은 높고 견고하며 칼을 잘쓰는 거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칼에 다 죽을것이며 그들이 보기에 자신들은 메뚜기 같을 것이라고 절망적으로 가나안땅을 악평을 합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 말을 전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밤새도록 울며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칼로 죽는 것보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것이 낫겠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결국은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못하고 주어진 환경을 바라보다가 죽은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문제는 광야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민수기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살아갈 때 환경보다는 하나님말씀에 순종하여 승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한것은 바로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절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앞서가서 적을 물리치고 항상 동행해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신명기에 열두정탐꾼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애초에 하나님께서 정탐할것없이 그냥 가나안에 올라가서 차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땅을 정탐하여 어느길로 올라가야 할지 어느성읍으로 들어가야 할지를 알게 해달라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정탐한 후에  "가나안땅을 믿음으로 보지 못하고 악평을 한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안에 내주하시고 예수님께서도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절망하며 울며 실패할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승리를 할것인가를 선택을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지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배 드리기가  어려워지고 전도를 하기가 어려워져도 절망하면 안됩니다. 이럴수록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3. 결론

사도바울은 자신의 삶을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기를 다마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믿음을 선택하는 삶이 선한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과같이 많은 증인들이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증거를 얻을 것을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다수가 반드시 올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오로지 하나님말씀만이 진리의 말씀이고 변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복음을 위한 싸움

데살로니가전서 2징 7절~12절 

1. 서론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바울이 제일먼저 기록한 바울서신입니다. 합신의 박형용교수님은 " 사도바울이 제일먼저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은 그만큼 다른교회보다 많을 핍박속에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함이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후서는 현대에 많은 핍박과 여려움에 있는 성도들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에서 고난을 이기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2. 본론

본문말씀인 살전2장에서는 사도바울은 자신이 마게도냐지역으로 성령을 인도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에서 받은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는 기간이 길어지거나 기도응답이 늦어지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됩니다. "아 나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가?"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가?라고 의문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데살로니가 전서를 통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결코  헛되지 않았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전도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복음을 위한 싸움을 이야기 합니다. 그는 첫번째로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아첨이라는 말의 의미는 "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는 말"이라고 사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말하는 의미는 " 남에게 복음으로 설득할때 사용하는 말이 불성실함"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만약의 복음을 전하면서 " 예수님을 믿으시면 성공하고 건강하고 우환도 없고 생업도 번창하며 항상 성장하는 일만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다면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아첨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때 " 고난당하는 일"을 면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로마서8장에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이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사도바울은 "탐심의 탈을 쓰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도를 할때 마음속에 탐심을 가지지도 않았지만 그것을 다른 것으로 가리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일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앞에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을 만한 훌륭한 사도였지만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세 번째로는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보살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은 유모와 같은 심정으로 보살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젖'을 먹이는 유모와 같이 자신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전했음을 말합니다. 모세는 태어나서 강에 버려졌지만 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납니다. 그의 어머니는 사실 어머니면서 유모였습니다. 젖을 떼야할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 하는 모세"를 어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양육했을까요? 바로 이런 심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사도바울는 " 하나님말씀이 교회에 효과 있게 전파되는 것"이 성령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의 복음의 사역을 올바르다고 증명하시는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유모와 같은 심정으로 복음을 전한 사도바울의 수고와 애씀을 바로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결론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이 복음의 싸움을 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우리의 복음 전하는 것을 보고 우리를 공격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전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하셔서 우리를 복음전하는 것을 증명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익이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마치 유모가 어린아이를 생명을 위하여 양육하듯이 그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우리를 격려해주심으로 우리는 늘 재림의 그리스도를 바라며 이 땅에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고린도전서 1장 18절~25절 

1. 서론

세상에서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이 "지혜"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앞일을 아는 "예지"의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알기만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 그것은 오히려 더 고통을 가져옵니다. 자신이 몇 년안에 암이 걸릴 것을 알아도 "그 암을 고칠 방법"이 없다면 그것은 더없는 고통의 시간이 됩니다. 그것에 비해서 하나님의 지혜는 언제나 사랑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성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삶이 온전하게 축복받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본론
하나님께서 이사야서를 통해서 "세상의 지혜와 총명을 없애겠다"고 선포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왕국의 왕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앞에 믿음으로 나가지 않고 "세상의 왕"들과 연합하여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바로 유다왕국의 왕과 백성들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하나님앞에서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떠났다"고 한탄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의지하는 세상의 지혜자들의 지혜를 멸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다는 북이스라엘이 강하고 그들이 자주 침입하여 괴롭게 하자 북방의 앗수르와 연합을 합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하자, 앗수르는 유다의 직접적인 위협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앞에 매달리지 않고 이번에는 애굽에 연합하여 앗수르의 공격을 막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바벨론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이 배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믿는 세상의 지혜자의 말과 능력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적용되고 현시대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창세전부터 영원토록 적용되고 실행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은 움직이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그 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그 내용과 더불어 능력이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바로 십자가의 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성령하나님의 도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통하여 생명을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도로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유대인들은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긴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통하여 세상의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결국은 세상의 지혜자들의 지혜를 멸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미련하고 약하게 보이나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있다면 세상의 가장 지혜로운 것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은 세상의 강한것보다 더 강하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지혜 또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말씀을 따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전하는 "십자가의 도"를 직접 성도들이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확실히 세상에서 심판으로 알게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는 지식인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결론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을 구원하고 살리는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로 하나님의 지혜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당장에 세상의 지혜가 우리를 삶을 변화시키듯이 보내지만 그것은 아주소소한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것이 세상에 가장 지혜로운것보다도 더 낫다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련한 것을 택하사 세상의 지혜로운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지혜의 주체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마가복음 5장 35절~-43절

1. 서론

현대시대를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 중에 " 두려움"이 커다란 이슈입니다. 세상은 복잡하고 다양하며 급속도로 빠르게 변하다보니 불안감이 더해서 "두려움"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급속도로 많아지는 것들중에 "공항장애"와 "우울증" 같은 질병들입니다. 실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실제 두려움으로 느껴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두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앞에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안에서 회당장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 "두려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본론

우리는 문제를 만나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문제가 있을때 그 문제의 해결자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면에서 야이로는 문제해결의 방향을 올바로 잡았습니다. 그는 회당장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당 시에 목수의 아들로 알려진 예수그리스도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예수님 앞에 간절히 무릎을 꿇고 간구"했습니다.

야이로의 집으로 예수님과 함께 가는 사이에 "12년간 혈루병을 앓아온 여인"을 만나 그녀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 여인의 병이 고쳐졌을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당도했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절망로 절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빨리가서 손을 얹고 기도했으면 나았을 지도 모르는데 이제는 다틀렸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도 모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말은 야이로가 자신의 딸이 위중했을때 " 예수님만이 이 문제의 해결자"라는 생각을 잃어 버리지 말고 굳게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지만 이미 나사로가 죽지 나흘이나 지난뒤였습니다. 나사로의 동생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일찍오셨더라면 자신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며 죽음을 이기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때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이 아이가 죽은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앞에서 해결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비웃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을 보고 비웃은 사람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부모를 데리고 들어가셔서 "달리다굼"이라고 외치십니다. "소녀야 일어나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면 죽음에서도 "일어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결론

이 땅에서 삶은 많은 두려움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문제들을 만났을때 절망하면 안됩니다. 문제의 해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려워하지말고 믿기만하라"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믿음을 굳건하게 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는 축복을 얻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마가복음 1장 1절~8절 

 1. 서론

요즘 사람들은 거의 무선이어폰을 사용해서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무얼 듣는것인지 아닌것인지도  알수가 없습니다. 때론 휴대폰을 보면서 길을 걸어다니기도 합니다. 그리고 걷다가 웃기도 합니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자신을 드라마 주인공으로  "투영"시키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자신의 신앙과 생각은 없고 오로지 드라마같은 인생을 꿈꾸게 되곤 합니다.  그에 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소망하며 현실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그 신앙의 고백의 핵심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구원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를 정말 그리스도답게 생각하고 살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예배에 참석한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삶속에 증명하고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본론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약성경이 계시한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예수는 그리스도 입니다"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박해하거나 핍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하던 당시에는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는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신앙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은 "신앙고백자"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목숨을 걸고 신앙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역시 목숨을 걸고"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런사람들은 불법을 저지르지 않으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활을 담당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글에서 "자신의 교인중에 공무원"인 성도가 있었다고 합니다.그런데 이 성도는 절대 부정직한 청탁은 받지 않으며 오로지 정직한 그리스도인처럼 일하겠다고 결심을 했더랍니다. 그리고 그는 진실로 성실하게 뇌물도 받지 않으며 일했지만 회사내에서 "왕따"가 되었다고 합니다. 상사들은 "너만 깨끗하냐?"라고 오히려 빈정거리가 일쑤였습니다. 결국은 직장을 그만두었고 정신과 치료를 6개월이나 받아야 했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윤리적인 부분은 정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은 더 깊어졌습니다. 이럴때일수록 "예수님께서 우리에 구원자"이심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계시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2위의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죄악을 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신앙고백을 하므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가려면  반드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씀뒤에 세례요한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고 잘못한 죄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3. 결론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입니다. 즉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를 용서함을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성도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삶속에 고백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입니다. 그런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이름조차 부르지말라

에베소서 5장 1절~5절

1. 서론

우리가 누구의 이름을 부른다는 자체는 "그 사람과의 관계가 발생되는 것이고 또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보게 되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여기에서 "꽃"은 특별한 존재나 의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성도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그와 이땅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본론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이름을 부르지 말아야 할것"을 말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음행과 더러운것과 탐욕"은 이름을 부르지도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세계의 맹주들이 패망한것은 그들보다 강력한 상대를 만나서 패망한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여인들" 때문에 패망을 했습니다. 은나라의 주왕은 "달기", 주나라의 유왕은 "포사", 당나라현종은 "양귀비" 때문에 망했습니다. 로마의 안토니우스도 이집트의 클라오파트라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를 본다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서 영원한 상급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음행과 더러운것과 탐욕을 불러서 망하는 길을 선택하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5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처럼 사랑가운데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상대방에게 무엇을 주려면 "자신이 먼저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상대방에게 줄수있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잘모르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옛모습에서 가지고 있는 "음행과 더러운것과 탐욕"을 버리고 새사람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깊은곳까지 통달하시는 성령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고 계속해서 옛사람에게 이끌리어 실패하는 삶으로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탐욕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으로 소유하거나 누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치 골로세서 3장 5절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탐욕과 탐심은 원어로 살펴보면 같은 뜻의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늦은 비와 이른 비"를 의지하지 않고 "비의 신"인 바알을 섬기므로 비를 많이 내려서 더 많은 풍요를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되 그안에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꾸짖었습니다. 겉으로보기에는 "기도도 잘하고 성경을 날마다 읽지만" 속에는 탐심으로 가득찬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음행과 더러운것과 탐욕은 "그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하셨지만 반드시 불러야 할 이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감사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말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과 복락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은 성도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찬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3. 결론

거룩한 성도는 "자신의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남에게 퍼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옛사람의 모습인 "음행과 더러운것과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날마다 시와 찬미와 감사하는 말들로 하나님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중심적인 삶이고 하나님을 신령한 복의 근원이라고 인정하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

에베소서 4장 12절~16절

1. 서론

우리는 삶에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훈련을 열심히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은 훈련에 대한 선한열매가 맺어져야 합니다. 그 열매를 보면 그 훈련의 고단함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일들은 훈련만을 하고 정작 대회에서 상을 받지 못하거나 시합당일에 어떤사정으로 인하여 대회에 나가지 못한다면 그 가치는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안에서 가치라는 것이 반드시 목표에 도달할 때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 삶은 우리가 그 열매를 보지 못하더라도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거룩한 성도"로 예수그리스도까지 닮아가는 믿음의 목표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훈련받고 믿음을 성장시키는 사관학교 같은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2. 본론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매일 실패하며 살지만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으니 이 땅에서 삶은 "이러나 저러나" 상관이 없습니까? 저는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기를 힘쓰며 영적훈련을 하는 성도는 이 땅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로 말미암아 욥과 같이 오랜 시간을 고난가운데 지내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믿고 믿음의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영적인 싸움의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 훈련은 에베소서 4장에서 바로 교회안에서 받게 됩니다. 그 믿음이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만큼 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완전한 의인이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가 더 어려운 것은 바로 구원받는 시점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적인 훈련을 받아왔는가 하면 어떤성도는 "십자가에 강도"처럼 마지막 때 하나님의 성도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이가 많은 성인이 되어서 구원을 받는 성도는 "영적인 훈련"에 어려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인생을 살아오면서 몸에 밴 "옛 사람의 습관"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나 다 교회를 통해서 영적인 훈련을 통해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만큼 성장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를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각종지혜를 교회를 통해서 알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는 지식을 알게 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는 지식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교회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풍성하신 분량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 역시 우리가 노력해서 가야 할 훈련인 것입니다.

3. 결론

만물의 주인되시고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성도로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것이 이 땅에서 성도의 믿음의 목표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하셔서 교회를 이 땅에 은혜의 수단으로 주셨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믿음이 성장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 그리스도의 충만

에베소서 1장 15절~23절

1. 서론 

우리가 이땅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가 베푸시는 구원과 영원한 복락에 참여하게되는 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우리가 무지하고 게흘러서, 게다가 변덕스럽기까지해서 우리속에 믿음을 키워가고 이 땅에서 믿음의 목표에 이르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서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돌보신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칼빈은 "우리는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있어서 우리는 천사와 같은 상태에 이르지 못하였고 이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가까이로 나아가는 한가지 방도를 마련해주셨다. 이는 바로 교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교회를 통하여 이땅에서 성도가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며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도록 하신 것이다. 

2. 본론

에베소서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령한 복을 얻게 하시며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비밀을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만물을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충만하시고 교회에 머리되시기 때문이다. "충만"이라는 뜻은 컵에 물을 따랐을때 어는 순간이 오면 물이 컵밖으로 쏱아진다. 컵에 물이 가득해서 한방울만 부으면 넘처흐르기 바로 전의 상태를 "충만"이라는 뜻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것도 "때가 차매"라는 뜻으로 그때가 충만때에 오셨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다.

 인간스스로는 해결불가능한 죄와 사망의 폭정과 권세 아래서 이 세상을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육체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해방시켰다. 이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땅에 만물속에 충만하게 거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신의 인격과 성품과 영광과 무한한 선한 통치를 그리스도의 육체를 통해 외부로 표현하신 것이다. 동시에 인간과 우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충만에 접근 가능하게 된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죄와 사망으로 타락한 이 땅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신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머리가 되시는 것이다.  교회를 통하여 성도는 하나님의 신령한 복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아는 지식을 배워간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을 뜻을 분별하여 이 땅에서 선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안에서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가야 한다. 믿음의 목표인 그리스도의 분량만큼 자라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3. 결론

만물에 충만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또한 이땅에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데에 바로 교회를 사용하신다. 우리는 교회안에서 안전하게 올바른 신앙인으로 믿음으로 자라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아는 지식에 지혜와 계시를 깨달아가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1. 서론

결혼식 축사에 등장하는 단골이야기가 있습니다. 군대에 갈때 한번 기도하고 , 바다에 배를 타러나갈 때 두번기도하고, 결혼할 때에는 세번기도한다는 주례말씀이 있습니다. 결혼의 중요성과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도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예수님이 재림하실때 "새하늘과 땅에서는"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것같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뒤에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역시 "가나안 혼인잔치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재림할때 공중혼인잔치"로 끝이 납니다. 

본문도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처녀와 같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슬기로운 다섯처녀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공중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2. 본론

유대의 결혼식은 지금의 결혼식과 달리 "밤중"에 합니다. 그리고 신랑이 한방중에 신부와 들러리를 데리고 신랑집에 가서 혼인잔치를 하게 됩니다.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부의 집앞에 있다가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에 도착하면 영접하여 맞아들입니다. 하지만 신랑이 오는 시간을 알수가 없으며 이때 신랑이 늦게 올때까지 기름을 준비하여 등을 켜서 밝혀야 합니다.

본문에서 어리석은 다섯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서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신랑이 오고 기름을 사가지고 왔을 때는 이미 신랑집 문을 닫히고 잔치에 참여할 수없었습니다. 이 말씀에 밤은 깊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이나 어리석은 처녀들이나 다 잠을 이기지 못하고 졸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집중해야 할것은 "성도는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깨어있다는 말은  등잔의 기름으로 비유하고 있는 "성령"을 충만하게 날마다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것이라고 전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것을 마지막 대사명으로 남기셨습니다.

마지막때가 오면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지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시간"이 올 것입니다. 성도는 이때 성령충만하지 못해서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많아 지는것입니다.

13장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이야 말로 복음을 거부하며 하나님 존재를 부정하는 밤이 깊은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모두 성령충만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겠습니다.

3. 결론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십니다. 그때는 밤이 깊은듯이 "죄악이 가득차고" 하나님을 거역할때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공중재림을 하십니다. 늘 성령으로 충만하여 충성된 종으로 기쁨으로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승리하는 믿음의 삶

야고보서 5장 7절~11절

1. 서론

나이가 들어서는 열정이 필요하고 젊었을때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5G의 통신이 시작되고 있는 세계는 점점 빨리 흘러갑니다. 그런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내”가 필수 덕목이지만 이것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식시장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동학개미라고 일컫는 개인투자자들은 많은 손실을 보기가 일쑤라는 것입니다. 개인투자자들이 많은 손실을 보는 한 가지 원인은 “인내심”이 없어서 기다리지 못하고 매수하거나 매도하기 때문이랍니다. 이제는 인내심이 “돈”이 연관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성경은  아주 오래전인 구약시대부터  “인내"를 강조해왔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인 야고보서에서는 “시험을 이기는 것”,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것들을 이야기한후에 "인내로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인내”로서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2. 본론

야고보서는 5장에서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행위로 나타내는 삶도 “인내와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인내”는 기본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2장13절에서도 “ 복스러운 소망과 하나님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는 성도의 기다림이 “농부의 씨앗”을 파종하고 기다림으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농부는 씨앗을 파종해놓고 언제나 씨앗이 나올까 관심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기다려야지 씨앗이 안나온다고 씨앗을 확인하려고 다시 파본다면 그것은 농사를 망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내하면서 재림의 기다리는 동안에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길이”라는 뜻은 오랫동안 재림을 기다려도 마음을 굳게하라“라는 뜻입니다. 서로 원망하지 말고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보고 인내하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인내하는 선지자는 바로 “욥”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재산이 날아가고 자녀들이 죽고 욥은 온갖 질병에 걸려 신음합니다. 친구들은 찾아와서 “욥의 믿음을 비난하며” 하나님앞에 무조건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욥을 보고 인내해야 할 것은 바로 욥의 결말을 알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욥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때 고난이 오기전보다 몇배나 더많은 축복을 주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가장어려운 것은 “고난의 원인과 기간”입니다. 원인과 기간을 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고난을 통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욥을 통하여서 원인과 기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과  악인이 잘나가는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결론에 가서 대부분은 악인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런 영화를 한번본후라면 그고난을 견딜 수 있는 소망이 생기는 법입니다.

3. 결론

야고보서를 통해서 성도가 이땅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삶은 시험을 이겨야 하고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며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하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가지고 승리하는 믿음이 되려면 “인내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견디고 버티다”보면 반드시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것입니다.
그런 승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약1:5-8 

1. 서론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라는 말은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하는 말씀이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사단은 믿음보다는 과학이나 인생의 경험등을 선택하도록 유혹한다. 우리는 어떤 문제이든지 말씀을 기억하고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불신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신앙적인 문제들도 신앙본질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면 믿음을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되며 실패하게 된다.

워터루전쟁의 영웅인 웰링턴 장군은 승전파티를 열었다. 그는 보석이 박힌 값비싼 지갑을 가지고 있었다. 육해공군이 다 모인 파티에서 지갑을 자랑하고 싶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바지속에 지갑이 없어졌다. 하객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내 보석지갑을 훔쳐간 범인을 잡겠다."라고 소리쳤다. 하객들은 각자의 호주머니를 조사하자고 했지만 한 노장군이 반대를 했다. 그리고 그 노장군은 황급히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과 웰링턴 장군은 그 노장군을 범인으로 생각했다. 

 1년 후에 다시 파티를 열려고 웰링턴 장군이 외투를 입었을 때 그 지갑이 그 외투안에 들어있었다. 웰링턴 장군은 그 노장군을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왜 호주머니 검사를 거부했습니까?" 노 장군은 대답했다. "그날밤 아내와 아이들이 굶고 있었습니다. 제 주머니속에는 가족들에게 줄 몇 조각의 빵이 들어있었습니다". 웰링턴 장군은 용서를 구했다. 자신이 호화스러운 파티를 여는동안에 부하들의 가족은 굶고 있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 본론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이지 율법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 본문말씀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찌보면 같은 구원에 문제를 다르게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문제를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믿음으로 칭의함을 받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것이 행함보다 구원에서 먼저 일어나는 순서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되면 먼저 일어나는 것은 성도의 마음속에  "새 생명" 심겨진다. 그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고 말한다. 이때 성도에게는 옛 사람의 모습과 새 생명의 모습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그후로부터 점차적으로 말씀을 듣고 성장하며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분량만큼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다. 

마태복음13장에서는 구원받은 성도가 자라기 시작하는 마음에 밭을 씨뿌리는 비유로 가르치고 있다. 성도는 구원받고 의심과 염려로 새로운 피조물로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사단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삶속에서 이러한 유혹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새로운 몸으로 구현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데 행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사단은 이런 의심을 사용하여 교회를 흔들기도 한다.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내가 기도해보니 이 교회 목사님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야"라고 시작한다. 그럼 교회안에 서로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동조하기 시작한다. 이때는 목사님이 어떤 올바른 소리를 해도 믿지 않는다. 믿음으로 서있지 않은 성도들은 사단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 결국은 불신이 있는 교회는 목사님을 믿는 사람들과 목사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로 갈라진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로서 의심하지 않고 믿음안에서 굳건하게 서서 행위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3. 결론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시고 산으로 혼자 기도하려가셨다. 제자들이 탄 배가 바람에 흔들려 바다 가운데로 나아갔을때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어서 오셨다. 베드로는 "주님이시어든 나를 바다윗로 걷게 하소서"라고  예수님께 구했다. 예수님은 허락하셨고 베드로는 바다위를 걸었다. 그때 바람이 불며 파도가 커다랗게 일어나자 베드로는 "바다 물결"을 보고 두려워서 바다물로 빠져갔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한 자야 어찌하여 의심하여 두려워하였느냐?" 라고 책망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가야 한다. 매 순간을 믿음으로 나가기를 간구하며 믿음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축복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

눅24:13-35

1. 서론

존웨슬리에게 "만일 당신이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하다니요? 아침에는 여전히 설교하고 약속한 사람을 만나고 집에서 저녁을 가족과 함께 먹고 기도한 후에 침상에 들어갈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천국에서 눈을 뜰것입니다" 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죽음의 문제와 같이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또 그 중요한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또한  많이 있습니다. 그 죽음의 문제가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지만 지금당장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성도는 존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죽음 뒤에는 다음날 천국에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2. 본론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갑니다. 하지만 이미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조금 일찍오셨다면 오빠인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는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마르다에게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묻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제자가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열 한제자에 속하는 제자들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중에 속해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몇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실망한 마음을 가지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면서 막달라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소식과 베드로가 다시 가서 무덤에 확인한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부활에 대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있는 천사들을 통해서 부활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으로 확실하게 풀어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다락박에 나타나셔서 자신에 부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거하셨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시며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셔야 하는 모든 성경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기 전에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엠마오 제자들에게 주실때" 그들이 눈이 밝아져 예수님이신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신것을 서로 이야기 할때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증거했습니다.

3. 결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속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구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예언했던 말씀들이 성취된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대속의 죄사함을 통해서 우리의 죄는 사해졌으면 이것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하실때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을 끝부분에서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부활에 증인들입니다. 증인은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바로 믿고 성령하나님의 인치심으로 확실한 증인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위기 뒤에 오는 축복

행5:12-16 

1. 서론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써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본성이 죄악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싸움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싸움의 기본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에 자신을 맡기고 싶어 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바나바는 자신의 명예보다는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을 받기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도들이 그것을 사용했습니다.

뉴스에 의하면 전주에 한 얼굴 없는 천사라 불리는 기부자는 매년 기부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17년 동안 4억9천만이 넘는 돈을 이름을 밝히지 않고 기부를 했습니다. 올해도 전주의 한 주민 센터에 전화가 왔습니다. 하지만 직원이 말하던 곳에 가봤지만 기부금은 없었습니다. 이 기부자가 올 것을 알고 3일 동안 잠복했다가 30초 만에 갖고 도망간 도둑들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CCTV와 주민의 신고로 잡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사회에 선을 행하려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달아나는 세상인 것입니다.

2. 본론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에 영향력도 커져만 갑니다.  이때 교회는 성장을 하지만 내적인 위기와 외적인 핍박을 받게 된다. 외적인 핍박은 성도들이 똘똘 뭉쳐서 기도함으로 막아낸다. 우리는 많은 사회적 국가적으로 실패한일들이 내부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을 보아왔다.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내적인 위기이다. 사단이 내적으로 침투하기 위해서 공격한 일이었다. 바나바의 헌금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교회가 헌금을 사용하므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등장합니다. 교회든 성도이든 무엇이든지 잘나가고 성장할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처럼 존경을 받고 자신이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아담이 최초의 원죄를 지을 때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성령으로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단의 거짓영"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만일 성령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으로 교회를 들어와서 분열시키고 참 교회의 본질에서 변질되었다면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시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게 도우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한 마음ㅇ 한뜻이 되어 서로의 물건을 통용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물어 버리신 예수그리스도의 화평이 성도의 삶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복음을 전파하며 순결을 지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부적인 위기와 외부적인 공격을 받지만 성령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이러한 위기 뒤에 교회는 하나님의 놀라는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며 능력 있는 교회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은 하나님의 징계는 성도들을 "불신앙"에서 멀리 떠나게 합니다. 그 결과로 교회는 더 강해지며 더욱 많은 사람들을 향해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3. 결론

좋은땅열매교회의 2020년 표어는 "하나님과 이웃에게 칭찬받는 교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교회 안에서 성도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단의 내적인 공격과 외적인 핍박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하며 많은 표적과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영광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에게 칭찬받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행3:1-10 

1. 서론

복음이 전파될 때 이사야 선지자는 "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듣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며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10일이 지나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8절에 나와 있듯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유다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 끝까지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 복음은 맹인이 보게 되면 못 걷는 자가 걷게 되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2. 본론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뮬러는 애쉴리 다운이라는 큰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겨울에 갑자기 보일러가 고장이 났습니다. 보일러 A/S를 신청했지만 기사는 일주일후나 도착한다는 연락입니다. 사람들은 조지뮬러에게 뛰어와서 "목사님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영아들이 있는 건물에도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아이들이 다 얼어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침을 뒤로하고 조지뮬러 목사님은 일어나 성경책을 옆구리에 낀 채 교회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밤을 새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씨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아버지!! 이 어린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생명들입니다. 이 아이들아 아버지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단지 총무일 뿐입니다. 시간과 때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아버지 날씨를 봄 날씨로 변화시켜주시옵소서. 그 후 갑자기 동풍이 불어 영국전체가 따스한 온실과 같은 날씨가 되었습니다. 보일러를 고친다음 정상적으로 가동되자 날씨는 다시 일주일 전 추운겨울로 돌아갔습니다.

본문에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 "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서 아침에 사람들이 메어 그곳에 앉혀놓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 내게 은과 금은 없어도 나사렛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는 발목과 다리에 힘을 얻어 걸어 뛰어 성전에도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앉은뱅이에게 구걸하게 도와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일어나 걷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그와 같이 걸어서 솔로몬 행각으로 걸어오는 앉은뱅이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일 왜 놀랍게 여기 느나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선포합니다.

3.결론

복음은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과 같이 "못 걷는 자가 걷게 되면 소경이 보게 되면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복음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며 많은 생명을 구원받았습니다.

그 구원이 우리에게 이르게 된 것을 감사하며 능력의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선물 

사도행전 2장 37절~43절

1. 서론

성경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어떤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선물을 위해 자신이 열심히 일을 해서 받았거나 돈을 주고 샀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그의 물건 갚을 치루 듯이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우리에게 구원과 행복을 주는 선물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베드로는 예수는 구약성경에 말하는 메시아임을 설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대해서 말하며 "그 예수그리스도"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회개를 합니다. 이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선물은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본론

하나님의 선물은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그 복음을 선물로 받아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반대로 복음을 듣고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달려들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순절성령께서 강림하신 후에 베드로 설교 후에는 유대인들과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어찌 할꼬"하며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설교가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가 있었는데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말합니다. 그 뒤에 저희가 큰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고 일심으로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돌로 쳤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듯이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복음이 우리에게 들릴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말씀2장 39절에서 "이 복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즉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창세전에 선택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유효적인 부르심에 응답한"성도들을 이야기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베르도 사도가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할 때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6장 24절을 통하여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말씀하십니다.

베드로사도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세례는 죄 씻음을 상징하는 표입니다. 그리고 회개함으로 응답할 때 그들에게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으로 인치시고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는 순간에 "인 치시는 것"이며 우리의 죄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져가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구원받는 성도는 "하나님이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3. 결론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해서 낮은 종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하나님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응답으로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 선물을 받은 성로로서 이 땅에서 땅끝 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마1:18-25 

1. 서론

 찰스디킨즈의 “두 도시의 이야기”에 나오는 영국인 죄수는 프랑스감옥에서 오랫동안 복역합니다. 그리고 좁고 어두운 감방이 그의 생활습관이 됩니다. 그는 매일 좁은 감방 안에서 걷는 운동을 했습니다. 날마다 자신이 걷는 신발소리가 귀에 젖습니다. 그리고 복역이 끝나고 영국에 돌아와서 자신의 넓은 집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넓은 집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거실 안에 벽돌을 쌓아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감방에서 했듯이 걸어 다니며 자신의 신발소리에서 안정감을 찾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죄 없는 삶이 불편하고 적응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무 죄의 삶이 익숙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죄 씻음을 받아 구원받고 난 삶은 밝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2. 본론

 참된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에 죄인에서 중생함을 입습니다. 중생이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성경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다”라고 말합니다. 중생함을 입는 일은 일순간에 이루어지며 전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중생함을 입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중생함을 입은 것은 성령하나님을 인하여 새 생명이 잉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정혼했지만 마리아가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요셉은 정혼한 것을 파혼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의 사자가 꿈속에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께서 하신 것이고 예수라는 구원자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구원자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동정녀마리아의 성령 잉태설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하지만 아직 예수그리스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구원할 때 중생을 시키는 것도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인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잉태된 사실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성부하나님과 성자그리스도 그리고 성령하나님께서 같이 사역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잉태할 수 없었던 사라에서 이삭을 잉태케 하신 것도 성령하나님의 사역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마태복음20장 28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3. 결론

 하나님의 성도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역시 성령하나님께서 성도의 마음속에 내주하시며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부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성자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이것을 현재에 예수님을 믿은 우리들에게 적용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중생함을 얻어 영원한 생명으로 천국에 가게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된 것은 새로운 생명을 심는 성령의 사역에 일관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감사하며 특이 이번 성탄절을 통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성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리아의 찬양

눅1:46-56

1. 서론

 우리의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주로 찬양으로 나타납니다. 도저히  상상도 못할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면 “오 주여 감사드립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그 감사는 말로 온전하게 표현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자유롭게 찬양할 수 있도록 성경에 나오는 찬양이나 시편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 시편이나 찬양을 기억해내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2. 본문

 본문말씀에서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보통 처녀가 아이를 갖는 일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격했습니다. 걱정스러움과 놀라움이 같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천사는 “네 친족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아 잉태를 하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지금 잉태한지 6개월이나 되었다”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잉태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라도 나이가 많아 잉태할 수 없는 나이에 이삭을 잉태했습니다. 그것은 사람 몸이 부활한 것과 같습니다. 죽었던 몸이 살아나서 잉태할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천사는 사라가 잉태할 수 없는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잉태했으며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리아에게 임한 성령으로 잉태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못한 일이 없으니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떠나갑니다.

 마리아는 멀리 떨어져있는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마리아를 보자마자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하여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태중에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축복합니다. 이어서 “내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어찌 된 일인고”라고 말합니다. 
 마리아의 예수그리스도의 잉태는 마리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복된 여자들이 몇 명이 나옵니다. 사사기에 “겐사람 허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 받을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가나안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라고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이때 사용된 “어여쁜 자”는 정관사에 전치사를 사용하여 “여인들 중에 가장 어여쁜 자”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마리아를 축복하는 복된 자도 “최상급”을 사용하여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46절부터 마리아의 찬양이 나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있다 일걸으리로다”라고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그리고 마음이 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과 영혼을 다 바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믿은 믿음은 과거 분사로 되어있습니다. 믿는 것이 한순간이 믿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계속해서 지금까지 믿고 있는 것입니다.

3. 결론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해주신 하나님께서 헤세드와 같은 사랑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세동안이나 복되게 하셨음을 알았고 그것을 찬양했습니다. 이 마리아의 찬양을 통해서 그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중에 우리들도 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복 받을 은혜를 주신 것에 영혼과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요6:1-15 

1. 서론

 미국의 정치인으로 일리노이주 검찰 총장을 지냈고 무신론자로 유명한 로버트 잉거솔을 반기독교 강연자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임종할 때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에 아버지를 따라 무신론자로 살아가야할까요? 그러자 잉거솔은 “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무신론은 허무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어머니를 따라 예수를 믿어라.”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마지막으로 죽을 때 “프랑스군대! 조세핀!”이라고 외치고 죽었습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어둡다 나에게 빛을 다오”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에 비해서 미국의 초대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좋다 저 세상은 참 아름답군.”이라고 말했으며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이제 당신께 가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사람들의 차이는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을 얻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2. 본론

 요한복음 6장1-15절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6절부터 21절까지는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걷는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절부터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베푸신 이유가 오천명이나 되는 거기 모인사람들의 한 끼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본문에서 오병이어를 베푸실 때가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말씀하는 것으로 보아 오병이어는 유월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먹는 양식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려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 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시면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포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병이어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 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병이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매달 첫째 주일 베풀어지는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을 얻은 성도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며 구원에 감사하고 그 구원을 기억하고 천국에서 다시 예수님과 식탁에서 먹고 마실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식을 먹어야 몸도 유지하고 생명을 유지 할 수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오병이어에서 바로 깨달아 매달 베풀어지는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때 구원받은 백성으로 믿음이 더욱 강화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에서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주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성찬에서도 똑같이 베풀어지며 그것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몸이 부서지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유월절이 오병이어와 관계가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 생명의 떡 그리고 예수님의 몸과 피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예수님이 구원을 베푸시는 수단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3. 결론

 오병이어가 끝나고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기적을 베풉니다. 같은 내용의 마태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오시는 것을 보고 자신도 걷게 해달라고 말씀하고 물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집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한끼의 식사가 아닌 영생을 위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으며 성찬을 통해서 그 은혜를 삶속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가나 혼인잔치

요2:1-12 

1. 서론

 어렸을 때는 동네에 혼인잔치가 있으면 동네의 잔치였습니다. 청년들은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물을 끓여 국수를 삶아냅니다. 그리고 육수가 담긴 그릇에 국수를 말아주면 다른 청년들이 연달아 손님 잔치 상에 나릅니다. 여름철에 혼인잔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겨울에 난방도 되지 않는 창고 같은 방까지 멍석을 깔아 손님들이 가득합니다. 지금 같으면 불평도 많았겠지만 그때는 그것이 즐거운 잔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물로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적을 넘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 것을 나타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로 시작한 예수님의 사역은 재림 때 공중에 혼인잔치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잔치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잔치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 본론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안드레와 요한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하여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물로 포도주를 만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마지막 밤에 새 언약을 선포하시며 그 표로 성찬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때 포도주는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예표 합니다. 구약에 예수님을 예표하는 “멜기세덱”도 아브라함을 축복하며 나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야인지  영광을 보고 제자들이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셨으며 그 피로 인하여 세상의 믿는 모든 사람들이 속죄함을 입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죽음의 사신이 그 집을 넘어간 것처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가나혼인잔치의 포도주는 그런 예수님의 공생애의 구원과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합니다. 이것은 그러면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예루살렘 성전과 동일한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곳이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헤롯성전이 아니라 바로 참 성전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느 한 부자가 천국 문앞에 다다랐습니다. 천사가 암호를 대라고 이야기 합니다. 교회의 헌금,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 구제 등을 외쳤지만 천국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말쑥한 신사가 도착했습니다. “나는 성직자로 일생을 섬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라고 외쳤지만 천국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꾸부정한 할머니가 도착했습니다. 허리는 굽었지만 얼굴은 빛이 납니다. 암호는 하고 천사가 묻자” 예수님의 보혈의 피“라고 말하자 천국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속량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죗값을 사신 것입니다. 이런 공생애의 시작이 가나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이유입니다.

3. 결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면서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신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성도로서 혼인잔치가 주는 풍성함과 기적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중혼인잔치에 초대되어 영원한 나라로 들어갑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 은혜를 잊지 않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임재

왕상8:1-11

1. 서론

 20세기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패커는 “견고한 크리스천”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영적자질을 시험해보자. 죄의 원리는 이렇게 말한다.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영광을 바치는 것을 원하면서 자신에게 영광이 되는 것들을 과시하며 살고 있다. 용모, 옷, 기술, 지위, 영향력, 집안, 두뇌, 사교력 등 자기가 자랑할만한 것들을 뽐내며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기대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자신에게 감명을 받지 않으면 분개하고 상처를 입는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2. 본론

 다윗은 하나님 성전을 건축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짓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다윗언약을 주셨습니다. 다윗 언약을 통해서 다윗의 후손 중에 영원한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을 대신해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안치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에 드린 양과 소가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 구름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임재 했습니다.

 성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임재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어졌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고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 성전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그리고 성전은 구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에 6장에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날짜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요 솔로몬이 왕이 된지 4년 둘째달에 성전을 건축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건축의 시작은 출애굽이 기준입니다. 이것은 성전건축이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구원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고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전건축을 하는 장소는 역대하 3장에 나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고 나옵니다. 이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곳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드려졌지만 실제 드린 것은 여호와이레로 준비된 숫양이었습니다. 이때 이삭은 3일이나 걸려서 모리아산에 자신이 번제로 드려질 나무를 지고 올라갔습니다. 이는 이삭이 예수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은 구원과 관계가 있고 예수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 땅을 구원하시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시키고 통치하시기 위한 만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령하나님께서 내주하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성도는 성령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말씀했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을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이야기 한다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3. 결론

 우리는 솔로몬 성전같이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만이 성전 같은 삶을 살면 안 됩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우리는 인도하시면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성도의 삶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내속에 계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 삶에 순종하므로 진정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도 천국을 경험하며 날마다 승리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의 감사기도

대상17:16-27 

1. 서론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대방에게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것을 말로 다 표현 하지 못해서 쩔쩔매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또 그것에 그치지 않고 다윗의 집에 먼 장래까지 말씀하시며 다윗을 존귀한자같이 여기셨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다윗이 시편 110편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윗자손으로 나실 것을 보는 영광”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야기하신 내용입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당연하게 다윗에게 이런 고백들이 나올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2. 본론
 다윗은 그런 마음으로 생각해보니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왕궁에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법궤는 자신이 친 장막 안에 있는 것이 무척이나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단선지자에게 하나님께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단선지자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성전을 짓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언약을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은 것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대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왕조를 세우고 다윗의 씨중에 한아들을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할 것이며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약속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다시는 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런 언약을 해주신 하나님께 다윗이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 관대 이렇게 축복해주십니까”라는 고백은 어찌 보면 당연해보입니다.
 우리에게 다윗언약은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다윗의 자손가운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를 알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영광입니다. 다윗의 언약 통해서 알려주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은 그 은혜를 우리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그리고 16절에는 “마리아에게서 예수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자신의 후손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영광을 감사로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택을 누리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복 받는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며 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만한 아무런 공로가 우리에게 없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내가 누구오며 내 집어 무엇이관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복 받은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십니까?”라는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결론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했듯이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는 먼저 구원에 감사해야하고

 이 땅에서 많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가 우리의 환경에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떨어질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감사를 하는 성도는 이 땅에서 더 많은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이번 감사절을 통해서 우리의 소출이 적어도 구원의 하나님께서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축복과 감사

고후13:13 

1. 서론

 교회 김장도 끝났고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바람까지 붑니다. 이번주가 지나면 추수감사절이 돌아옵니다. 추수감사절은 한해를 돌아보고 감사의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의 요건을 찾을 때 불신앙 인들은 “돈을 많이 벌거나 , 건강한 것”등만으로 감사의 조건을 찾기 마련입니다. 많은 돈을 갑자기 얻는 경우에 그 마지막이 좋은 경우를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그 길부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기본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 땅에서 풍성하게 누리도록 많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2. 본론

 오늘 본문은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들이 축도를 하는 성경본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좋은땅열매교회 성도와 교회위에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 합니다”라고 축복기도를 합니다. 

 이 축도의 기원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하는 축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축복기도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라고 민수기 6장 27절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나 축도를 받기를 좋아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 맨 뒤에 앉아 있다가 목사님이 축도를 하면 도망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축복에서 도망가는 경우입니다. 

 민수기 6장에서 제사장들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축복하는 말씀에 “복을 주시고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를” 축도합니다. 이 말씀은 신약시대에 바울서신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3절에서 보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원합니다. 유대인들은 축복에 말씀을 들으면 민수기 6장에 제사장들의 축복기도를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는 것을 축원합니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으로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지만 바울서신에서는 성자 하나님의 이름이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하나님까지 등장하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축복 기도합니다. 

 이를 본다면 오늘날 예배 후에 축도는 “구약에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도”하던 그 축복기도의 연장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고린도후서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기도를 하는 것으로 확장된 것 입니다. 이런 기도는 민수기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같이 내 이름으로 예배에 온 성도들에게 축복할지니 그리하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의 축도를 받는 것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 입니다. 우리가 받는 복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날 성도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적용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사모하는 심령으로 예배에 나와야 하며 목사님의 축복기도를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3. 결론

 웨스터민스터 예배모범에 보면 “정해진 주일예배에 사모하는 심정으로 와서 마지막시간까지 예배에 참석해야 함”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모하는 심령으로 기도하고 예배에 자리로 나와서 예배의 마지막 시간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을 사모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복된 삶을 거룩한 성도로 삶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

살후1:3-12 

1. 서론

 사도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늘 기도제목이기도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본론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근시가 심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노안이 오자 근시와 원시가 심해져서 안경을 두 개나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늘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안경집은 금속으로 되어 있어서 무겁고 늘 지니고 다녀야 해서 불편하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쉬렌크라는 사람으로부터 저격을 받았습니다. 루즈벨트는 저격을 당했지만 연설을 마무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연설이 끝나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의사는 정밀검사를 해보고는 “불행 중 다행입니다. 총알은 안경집에 맞고 빗나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늘 기도하는 것, 늘 예배에 늦지 말아야 하는 것, 주일을 지키는 것 등은 불편한 것 같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을 잡아주는 것들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삶을 “복음”에 바쳤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선교비용을 충당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16장에서 사도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던 자신에 생각이 틀렸으며 성령께서 마게도냐로 가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빌립보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옷이 찢겨지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실라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자신을 방해하는 유대인을 피해 데살로니가지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웠습니다. 

 다른 교회들과 달리 데살로니가교회에는 한 달 정도 되는 짧은 시간밖에 교회에 머물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가서 다시한번 말씀으로 그들을 양육해야 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사단이 방해함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교회의 소식을 듣고서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려운 상황가운데서도 그들의 믿음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은 사랑이 넘쳤으며 박해와 환란 중에서 인내와 믿음으로 그것을 견디어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숙함은 모든 교회에 자랑 할 만하다고 말합니다. 

 성도는 삶속에서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때 좌절하지만 성도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이김으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박해일지라도 그것이 환란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는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아빠와 일곱 살 오빠와 다섯 살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오빠가 교통사고가 나서 헌혈이 필요했는데 그 혈액형은 다섯 살짜리 동생에게 수혈을 받아야 했습니다. 엄마는 딸에게 “오빠가 수술을 하게 되서 네 피를 주어야 하는데 줄 수 있니?”라고 물었습니다. 다섯 살짜리 딸은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수혈로 수술을 무사히 끝났고 수혈을 마친 동생도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네 덕분에 오빠는 살아났어!”라고 동생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동생은 “그럼 나는 언제 죽게 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동생은 수혈을 하면 자신이 죽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3. 결론

스바냐선 지자는 “전심으로 기쁘고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그 이유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감사의 조건입니다. 

늘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넘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서

신30:11-14 

1. 서론

 어느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유명한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우리아이는 워낙 총명해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입니다”라고 말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선생님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어떻습니까? 똑똑하지요? 하나을 가르치면 열을 알죠?“라고 물었습니다. ”네 똑똑합니다. 문제는 그 중요한 하나를 모른다는 것 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잘 배우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온전하게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2. 본론

 누가복음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집에 방문하셨는데 마르다는 저녁준비에 분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발아래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가 못마땅해서 예수님께 불평을 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맡기고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저의 일을 도우라고 일러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화난 마르다를 두 번이나 부르시고 다정하게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을 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한가지이다. 마리아가 그 많은 것 중에 참 좋은 몫을 선택했으니 그것을 빼앗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서 “식당봉사가 중요 하냐 성가대가 중요 하냐”의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는 예배에 집중하고 설교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도 중식준비만 신경을 써서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은 많은 일에 분주한 것입니다. 

 본문말씀인 신명기 30장은 복 받는 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그 명령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서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신명기에서 사람들에게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냐고 물어보면 “그 말씀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 가져와야 하기에”라고 핑계를 댑니다. 또는 “말씀을 행하려면 그 말씀이 바다 끝에 있기에 그것을 누가 가져와서 들려주고 행하라고 해야”할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하늘 끝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끝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입에 있고 마음에 있으니 그것을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명문대를 나와야만 그 말씀을 읽고 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하나님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혹은 돈을 1억씩을 가져와서 돈을 지불해야만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그 길은 어려운 것 도 아니요 힘든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그 뜻을 다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잠언말씀에 게으른 사람은 “사자가 밖에 있어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고 핑계를 대며 “자기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고 말씀합니다.

3. 결론

 만나지 못해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법입니다. 요즈음은 개인적인 시간과 관계가 중요시되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어디에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핸드폰에도 컴퓨터에도 그리고 성경책으로도 많은 곳에 있습니다. 그 복 받는 말씀을 늘 읽고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는 길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그것을 꺼내 묵상하며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한 말씀을 깨닫는 은혜와 행하는 믿음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맹렬한 불과 같은 여호와

신9:1-5 

1. 서론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명령에 모리아산으로 이삭과 함께 가서 장작위에 이삭을 누이고 칼을 높이든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다급하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나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수양이 뿔이 나무에 걸려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숫양으로 이삭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뜻입니다.

2. 본론

 하나님은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샬롬(여호와는 나의평강) 등으로 나타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은 “맹렬한 불과 같이 나가서 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알고 있듯이 가나안땅에는 “키가 크고 칼 잘 쓰는 아낙자손”이 살고 있으며 그 성은 하늘에 닿았다고 느낄 만큼 높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앞서가셔서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보다 앞서가시는 하나님

 신명기 9장 1절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으면 너희 앞에 멸망된 민족들같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말씀을 청종하면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뺀 10명의 정탐꾼은 그곳에 아낙자손 때문에 못 들어가고 칼에 죽을 것 같다고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여호와 말씀을 잘 청종하면 반드시 땅을 차지 할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너희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앞서간다. 내가 맹렬한 불과 같이 나가서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홍해가 가로막혀있을 때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고 무사히 강을 마른땅으로 건너게 하신 것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 때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말씀에 순종했을 뿐입니다.

 아낙자손은 이스라엘백성의 걱정대로 성벽은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았으며 그들은 외부침입에 만발의 준비를 다한 민족의 정예부대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백성은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서 방황하던 민족입니다. 그들이 훈련된 아낙자손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말씀을 청종하고 그것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전쟁에 이기고 그 땅을 차지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승리는 선봉에선 장수가 어떻게 치고 나가는 가에 따라 승패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치고 나가신다면 그 어떤 훈련된 정예병이라도 무찌르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 5장에 보면 드보라와 가나안 왕의 군대장관과의 전쟁을 보면 이스라엘이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왕 야빈을 이기는 것은 바위에 계란을 치는 것과 같이 뻔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우기 때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에는 진흙이 단단한 땅과 같아서 그곳을 철병거로 몰고 다시며 전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랑 대치했을 때 갑자기 비가 내려 기손강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러자 철병거는 무거워 진흙 속에 빠져 꼼짝 못 하였고, 이스라엘의 활에 오도 가도 못하고 멸망당했습니다.

3. 결론

 우리는 누구와 싸움을 하는지 그들을 잘 분석하여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손자병법에 나와 있는 것만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싸움은 싸움을 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는,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맹렬한 불과같이 앞서나가서 싸우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야 이 땅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100전 100승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들어가서 얻으라

신1:6-8 

1. 서론

 크리스 스필먼이라는 미식축구 선수는 강하고 억센 라인 백으로 활약하고 있는 선수입니다. 이 선수는 미식축구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습니다. 그는 현란한 몸동작과 열정 때문에 팬들을 매료시킵니다. 그런데 1998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그의 아내가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아내를 돌보기 위해 1년간 경기에 불참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스필먼은 기자들에게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약속했어요. 내가 그녀를 병원에 데려갈 것이며,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줄 것이며, 내가 아이들을 돌볼 것이라구요. 이제 그 약속을 지킬 때가 왔어요.” 그는 억센 미식축구선수였지만 그의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 사이에 약속도 이렇게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은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2. 본론

 창세기15장에서 아브라함은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번영해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후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네게 주어서 소유로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을 소유로 받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나가서 하늘의 별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후사가 이와 같이 번성 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준비한 쪼개진 제물사이로 연기 나는 횃불로 지나가십니다. 그 의미는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언약 체결 식을 하신 것입니다. 그 언약은 반드시 죽음으로서라도 지키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확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신명기에 나오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취됩니다.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조상들에게 약속해주신 땅에 들어가서 취하기만 하면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너희는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사람을 먼저 보내어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자”라고 말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시행하기 위한 작전은 모세도 “좋게 여겼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탐꾼들은 그 땅에 열매를 손에 가지고 와서는 “우리의 하나님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이 좋더라”고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아모리 족속의 장대한 키와 칼을 보고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라고 불평합니다. 모세는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무서워 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하며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울 실 것이다“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들의 불평은 통곡으로 변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3. 결론

 하나님의 약속에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네 앞에 서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 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은 “믿음”으로 하나님약속에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땅에서도 믿음으로 순종하여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

고후6:1-10 

1. 서론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 된 것 입니다. 지난번에 길을 가다가 “때가 이르되”라는 간판을 보았습니다. 영어로 “The Last days”였습니다. 그것은 종말이나 말세를 의미하는 뜻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이름을 지은 것을 보니 “아마도 커피를 마실 마지막 때”라는 의미로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단테의 신곡 중에서 “지옥 편에 보면 지옥 입구위에 ‘지금부터는 어떠한 희망도 버려라‘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 본론

 본문말씀 2절에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49장 8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는 특별한 은혜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가 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헛되게 하는 시기와 분열과 분쟁과 육체의 욕심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구원받은 성도는 이 하나님의 때에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복음의 초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때는 영원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 때 방주에 들어오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창7:6)”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구원의 때는 반드시 문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장 29절에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백부장 고넬료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앞에서 고넬료에게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라고 묻습니다. 고넬료는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모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입으로 선포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듣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고 그 복음으로 인하여 “그 집안에 모든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때 성령하나님께서 이 집에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넬료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때는 고넬료의 집에 ”은혜 받을 만한 때“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복음을 전하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헛되다”라는 말씀은 그 뜻을 살펴보면 “공허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공허하지 않게 복된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그 복음을 헛되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툼이 일어났고 시기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심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로서 은혜의 때를 놓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3. 결론

 오늘도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어느 누군가의 복음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그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자신일 수도 있고 주변에 있는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은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땅 끝까지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은혜를 받도록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한 은혜가 가정과 교회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욱여쌈을 당하여도 

고후4:7-15 

1. 서론 

 현대인은 과거 사람들에 비해 많이 물질적으로 풍부해졌지만 날다마 상대적인 빈곤감을 더해만 갑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졌지만 늘 부족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신학자 징크는 현대인을 다음과 같은 예화로 말합니다. “어느날 한 청년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면서 온갖 장비를 준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식수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만에 식수가 바닥이 나 버렸습니다. 그는 기진해 쓰러졌고, 마침내 실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그는 눈을 떠보니 눈앞에 야자수가 보였고,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렸습니다. 그는 이제 죽을 때가 되었나보다 환각이 보이는 것을 보니 라고 생각하고 애써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자 귓가에 물소리와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여왔습니다. 그는 아 이제 정말 내가 죽게 되는 구나하고 또다시 소리에 귀를 닫았습니다. 그리고 죽어갔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사막의 베두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오아시스에 물을 길으러 왔다가 물가에서 입술이 타들어가 죽은 청년을 발견하였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은 왜 물가에서 목말라 죽었을까요? 그러자 아버지가 ”얘야 여기 죽어있는 젊은이는 “현대인”이란다“라고 말했습니다.

2. 본론

 본문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우리들은 “질그릇에 담긴 보배”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깨어지기 쉬운 육신을 가진 존재이고 우리 안에 담겨있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보배라는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땅에서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순간 실패하는 것입니다. 승리의 원동력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그리스도를 옆에 두고 날마다 실패하며 상대적 빈곤감으로 낙심하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며 낙심치 않는 것은 바로 삶에 원동력이 예수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성도들의 귀에 대고 끊임없이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기억하지도 않고 너를 버리셨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올바른 성도는 말씀 속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동행하시고 이 땅에서 모든 삶을 이끌고 계신 것을 알고 있기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도 동행하시면서 성도에게는 욱여쌈을 당하는 일과 핍박이 있는 것일까요? 10절에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확고한 부활의 소망은 그 어떤것도 우리를 에워싸서 넘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우리는 그 고난 받은 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고난이나 핍박이 오면 올수록 영광도 커지는 것입니다.

3. 결론

 이 땅에서 많은 풍부함을 감사함으로 여기며 낙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보배 되시고 우리로 동행하시며 우리가 부활하는 주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환란과 핍박이 올지라도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영광으로 나타날 것을 알기에 모든 이 땅에서 삶이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과 고난이 우리 삶에 있는 것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 성도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 지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고난도 넉넉히 이기며 더욱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비밀

고전 15:35-49

1. 서론

 고린도교회에서나 현대사회에서나 부활에 대한 질문은 그 내용이 비슷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오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바울은 네가 무엇을 얻고자 할 때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알맹이인 씨앗을 뿌린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과를 얻으려고 사과를 심는 것이 아니라 사과씨를 심습니다. 사과의 씨는 사과와 모양이 다릅니다. 그 씨만 본다면 사과가 열리는 것은 신비에 가깝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로 죄로 인해서 부패한 육신이 땅에 묻어 썩어지고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 새로운 부활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2. 본론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수님오시기 384년 전 철학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토리를 예로 들어 본질은 형상. 눈에 보이는 것은 질료로 목적은 본질을 실현하는 것으로 도토리가 도토리나무가 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즉 도토리 안에 도토리나무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은 죄로 부패해있는 현재의 몸으로 부활하지 않는 것이 당연해보입니다. 사도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라고 말합니다. 즉 현재의 썩을 몸으로 부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 인간의 몸은 죄로 인해서 죽어서 썩습니다.

 부활은 어찌 보면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했을 때 참지식과 의와 거룩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아담은 교리를 배우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히 잘 알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면 영원한 영생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범죄 함으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라고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 뒤로 인간의 몸은 썩기 시작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물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에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합니다. 
 아담이 범죄 함으로 인해서 모든 피조물들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죄를 사하시므로 우리는 생명을 얻었으며 재림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 부활은 창조질서의 회복입니다.

 사도바울은 15장38절에서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의 형체는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라고 말하고 있는데 , 여기에서 “그 뜻대로”라는 것은 과거부정형입니다. 그러므로 이 뜻은 “형체는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부활할 때 부활할 몸도”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뜻입니다. 38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사람이 씨를 뿌리지만 그 형체를 입히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며 부활체의 형체를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죄가 사해지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온전한 창조질서가 회복될 때 모든 피조물은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부활할 몸도 썩을 것에서 썩지 않을 것으로 욕된 것에서 영광스러운 것, 그리고 약한 것에서 강한 것으로 육의 몸에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이 뜻은 썩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영원한 하나님 영광 가운데 살아가는 신비한 부활체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결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도 부활에 참여할 것을 확증했습니다. 부활은 어떤 과학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이 땅에서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신 것처럼 우리도 재림 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참지식과 의와 거룩도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영광스럽게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놀라운 축복에 감사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

고전10:1-13

1. 서론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홍해를 건너며 세례를 받았고 생명의 양식인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반석으로부터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늘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악을 즐겨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에게 구약을 거울삼아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기를 권면합니다.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려면 4가지를 주의해야합니다. 첫 번째는 우상숭배, 두 번째는 음행, 세 번째는 하나님을 시험함, 네 번째는 불평하는 것입니다.

2. 본론

 십계명에 첫 번째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입니다. 두 번째는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절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백성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이 제단주위를 돌면서 뛰노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모세가 내려가서 아론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네가 백성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그러자 아론이 “백성들이 금을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습니다.”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백성을 용서하지 않으실 거라면 “자신을 기록된 생명책에서 빼달라”고 중보기도를 합니다. 이것에 하나님의 용서는 받지만 레위족속에서 3천명이나 죽음을 당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그 죗값을 치르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음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있을 때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했습니다. 그 여자들이 자기 신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여 먹고 그 신들에게 절하므로 바알 브올에 가담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일로 인해서 전염병으로 2만 4천명이 죽습니다.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이 일은 부끄러운 과거역사로 기억합니다. 신4:3-4, 시106:28-29, 호9:10 등에서 이 일을 기록하여 거울로 삼았습니다. 

 현대시대에는 성적인 타락으로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도와 목회자까지 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거룩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신명기 6장에는 “들어라”라는 뜻인 쉐마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말씀입니다. 그곳에서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며 이 말씀을 늘 가르치고 손목에 매어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불순종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이 말씀은 시편95편에서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와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도 나를 시험하여 조사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말씀을 가지고 ”그런가 아닌가“하여 시험하지 말고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불평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열 두 정탐꾼이 돌아와 보고하는 내용을 듣고서 밤새도록 울며 하나님 앞에 불평합니다. “차라리 애굽에 있었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가나안까지 와서 아낙자손에 칼에 죽게 되었다‘라고 밤새도록 불평하며 통곡을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너희가 하는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대로 그대로 행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20세 이상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3. 결론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우상숭배와 음행과 주를 시험하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불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늘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기에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많은 죄악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켜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상 얻는 자

고전9:24-27

1. 서론

 고린도전서를 읽다가 보면 고린도교회는 이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를 거울삼아 이 시대에 올바른 교회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을 전한 후에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염려하며 자신을 몸을 처서 복종 하게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2. 본론

 우리에게 우리자신의 몸을 처서 복종하게 하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운동장에서 달리기하는 선수와 같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24절에서는 경기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 상 받는 자가 한명임을 명심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상 받는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절제”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가) 절제는 운동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입니다.

 운동선수가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절제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절제가 필요하며, 음식을 절제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잠언말씀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운동선수에게는 절제가 중요합니다. 성도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며 많은 것에 절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는 것도 인내와 절제가 필요합니다. 특히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절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성 빠실은 평소에 두통이 심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과연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두통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죄악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다시 두통이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절제를 위해서 주어지는 고난도 감사해야 합니다.

 나) 달리기하는 선수는 목표를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향방 없이 물위를 떠돌아다니는 배를 보고 표류했다”라고 말합니다. 성도의 삶도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다닌다면 이 땅에서 올바른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숲에서 길 잃어버려서 조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숲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큰 원을 그리며 그곳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때 긴 덩굴을 허리에 차고 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자신의 똑바로 가는지 아니면 한쪽으로 치우쳐 가고 있는지 알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목표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신 성경과 기도입니다. 말씀을 푯대삼아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합니다. 성도의  삶은 과거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나아가는 삶입니다.  

 다) 성도는 영적전쟁을 하면 살아갑니다.

 사도바울은 싸우기를 허공에 치는 것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성도의 삶은 영적전쟁을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영적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앞으로 전진 하지 못합니다. 그곳에서 고전한다면 매일 그 자리 그 삶에서 묶여있게 됩니다. 사단은 우리 몸을 공격하여 성도의 몸을 불의 병기로 사용하려 합니다. 성도는 영적싸움에서 이겨서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살아가야 합니다.

3. 결론

 성도의 삶은 운동선수와 같습니다. 운동선수와 같이 많은 훈련과 절제가 필요하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도 운동선수와 같이 달려갑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로 향하는지 어떤 길로 가는지 모르고 달려 나갑니다. 그 길이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상급을 주시며 축복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에 성도가 절제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상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 받은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행18:1-11 


1. 서론

 주택가에 붙어있는 조그만 목공소가 있었습니다. 자세히 관심 있게 보지 않으면 그곳에 목공소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화려한 붉은 꽃이 현관 담 벽에 피어있었습니다. 소박한 주택에 붙어서 지은 조그마한 목공소라 못 볼 뻔 했습니다.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작업장은 아주 소박하게 잘 지어져있습니다. 침대를 만드는 목공소였습니다. 그 옆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목재들이 쌓여있었고 목수는 그것을 가공하여 아름다운 침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목수가 작업장으로 들어왔을 때 그에게 침대의 아름다움과 작업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목수는 “둘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일하는 목수가 있나 주변을 살펴보자 그 목수가 손끝을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여기서 일하지요. 하나님은 나무를 만드시고 나는 침대를 만들어요.“

2. 본론

 그 침대를 만드는 목수는 하나님과 아름다운 동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 맡는 은사와 생각을 주셔서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 인도하심 중에는 자신도 잘 모르게 하나님께 쓰여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바울의 동역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중에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나옵니다. 루포의 아버지는 아리마대요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리마대요셉은 자기가 원하지 않았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의 아들은 그덕분에 믿음 좋은 신앙에 은택을 받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굴라가 남편으로 유대인입니다. 브리스길라는 부인으로 로마귀족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로마에서 기독교인으로 만나 신분상차이에도 결혼을 했고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로마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지방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을 만났고 그의 중요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면 아마도 사도바울보다 먼저 로마로 돌아가서 믿음을 가진 성도로서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살펴보면 우선은 사회의 신분을 극복하고 결혼하고 로마에서 쫓겨났지만 더 굳건하게 믿음으로 서서 사도바울의 사역을 도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에베소로 갔는데 그곳에서 아볼로를 만났습니다. 그는 당시에 최고의 학파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왔습니다. 성경에 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볼로는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세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라고 말합니다. 즉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냥 열심히만 하나님 일을 한 것뿐만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지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사도바울이후에 고린도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서에 “사도바울을 위해서 자신들의 목까지 내놓았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바쳐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고 사도바울을 도왔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그는 자신들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습니다. 물질 또한 아끼지 않고 하나님에 일에 내놓은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 삶이었습니다.

3. 결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지식을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사용했음을 보게 됩니다. 올바른 성도의 표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진 지식과 재능과 은사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는 거룩한 성도가 됩시다. 그런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사용하여 주십니다. 그런 좋은땅열매교회에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덕을 세우는 은사

고전14:1-6 

1. 서론

 그렇게도 잘 나가던 유니클로가 하루아침에 매장을 폐장해야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달전 만하더라도 유니클로는 한국에서 매장을 닫아야 하는 것을 예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일본수상 아베가 위안부배상판결문제로 한국에 경제보복을 시행하자 한국 국민 스스로가 일본제품 불매운동f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브랜드가 유니클로와 ABC마트입니다.

 기업뿐만 아니라 사람개인들이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합니다. 이것을 알며 대비하여 그 어려운 일을 피해가겠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점치는 것이 예언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에 말하는 예언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성경의 예언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 받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2. 본론

 물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개인에게 계시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성경이 완성되어 성경으로 응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기도응답을 주시지만 그것은 기존에 있는 성경말씀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예언기도라고 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점치듯이 기도하는 것에 유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성령이 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을 분별함을”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 은사는 한 성령께서 나눠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지금도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에서 일하게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만 예언의 은사는 조금 바뀌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를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를 풀어주고 설명해주고 설교를 통해서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주변에 “직통계시”라는 하나님의 은사를 추구하는 신사도운동을 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언기도라고 하면서 미래를 마치 무당이 점을 치듯이 기도해주는 예언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은사를 통해서 일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여러 가지 환경에 따라 온전한 성도로 성장하기에는 부족한 부분들이 있는데 이것을 은사를 통해서 채워주고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은사는 더 이상 은사로서 그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척되고 어느 정도 부흥하게 되면 교회 안에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파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 기도파에 잘못된 신앙이 들어가면 예언기도를 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쳐서 교회에서 이탈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령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을 이탈한 것입니다. 은사는 반드시 교회에 덕을 세우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교회에 리더인 목사님께 여러가지 문제를 의논하고 허락을 맡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이단의 문제를 알려주는 사이트인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에서 이러한 이단에 성도들이 유혹되는 이유에 대해서 글이 올라왔습니다.

 1) 올바른 성경지식의 부재, 
2) 개인적 카타르시스를 담는 경험을 선호,
 3) 자신의 상처나 욕심을 투영, 
4) 악한영의 역사 등을 말합니다.

 전적으로 동의가 되는 의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교리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3. 결론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를 구원받는 즉시로 천국으로 부르시지 않는 이유는 이 땅에서 성도들이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성화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라십니다. 그 일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교회의 사역을 돕고 덕을 세우기 위해 은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은사를 통해 교회에 덕을 세우며 늘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믿음

왕상17:8-16 

1. 서론

 한 교회 장로님이 늘 원망과 불평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중에서 아담하고 하와는 왜 죄를 범해서 이 세상에서 살기가 힘들게 했냐고 하는 불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평에 정도가 도를 넘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이 장로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식사기도를 마치고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목사님은 식사기도는 했으니 식사를 먼저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가시면서 가운데 있는 그릇은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목사님이 한참동안이나 안 들오자 장로님은 그릇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살짝 열어보고 닫아놓으려고 그릇 뚜껑을 열었을 때 작은 새 한 마리가 푸드덕하고 날라가 버렸습니다. 장로님이 새를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이에 목사님께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장로님도 아담의 후손이 확실 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에 필수요소가 순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2. 본론

 성경에서 순종하면 아브라함이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100세에 얻은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이삭이 지금의 고등학생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많은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더라도 하나님은 약속을 절대적으로 지키시는 분이므로 결국은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이세벨의 고향인 시돈 사람입니다. 그곳은 우상의 본거지였습니다. 그는 가뭄으로 인해서 먹을 양식이 떨어져 마지막 남은 양식을 아들과 마지막 만찬으로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마지막 음식을 물과 함께 가져오라는 엘리야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엘리야는 만약에 그가 말하는 말씀에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비가 내리기전까지 그 통에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그 과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므로 그 고난도 이기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순종은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과 약속을 근거로 우리에게 고난도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므로 반드시 응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와 엘리사는 성경에서 대표적인 능력의 선지자입니다. 그 말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면 결국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가득 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가장악한 왕인 아합과 그의 아내인 이세벨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우상을 섬기며 장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아합 앞에서 선포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릿시냇가에서 까마귀를 통하여 공궤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시냇물이 마르자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다음에는 ”바알의 선지자들 450명과 대결하여 그들을 처단합니다“. 이 말씀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를 내리게한다“는 우상인 바알을 믿는 것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말합니다. 오직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가운데 유지하시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 결론

 사르밧 과부는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고난극복과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공로가 없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복음을 듣게 하셔서 구원하신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아무 연고 없이 시돈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과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견고한 하나님의 사랑

롬 8:31-39

1. 서론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 용어가 추상적인 때가 많고 진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엇이든지 용납하는 자유방임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 사랑의 범주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허용하는 기준이 시대마다 다르고 그 시대의 사람들의 기준에 의하여 정해집니다. 진정한 사랑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보다 강한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의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신실하십니다.

2. 본론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은 성도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실함과 열정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이 땅에서 성도로 살아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첫 번째는 정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부르심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Good News(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사방의 North, East, West, South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것들이 News입니다. 복음은 사방에 들려오는 새로운 좋은 소식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심이 “소명”입니다. 그런데 이소명이라는 뜻이 이 시대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왜곡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명이 마치 좁은길로 가야 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축소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비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좁은길로 가는 것이 반드시 부족하고 어렵고 빈곤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좁은길로 나아가면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 가운에 큰 풍요를 누리면 살 수 기 있습니다. 그곳에는 큰 광장과도 같은 측정하기도 힘든 하나님의 놀라운 풍요한 삶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도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이 풍요한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스기니스에 소명이라는 책에서 소명에 따라 사는, 역사적으로 풍요해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중국의 초대선교사였던 허드슨테일러의 동역자였던 헨리 기니스의 증손자입니다. 그는 난징에서 태어나 난징에서 자랐습니다. 난징은 명나라의 옛 수도였고 15세기만 해도 난징은 세계적으로 가장 부유하고 가장 막강한나라의 수도였습니다. 수 천 년 누린 위대한 중국 권력에서 태어난 황제들의 눈부신 혁신과 지혜로 광대한 제국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콜롬비아 선박보다 더 빠른, 더 큰 배를 거느린 함대와 제독을 아프리카에 파병했으며 북경에 십만채로 된 새로운 자금성을 짓기위해 백만명을 급파했습니다. 

 주후1500년에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도대체 갑자기 문화적으로 침체되었던 아시아 대륙의 끝에 있던 작은 변방인 유럽에 의해서 빛을 잃고 추월당하고 지배되리라 생각했겠습니까? 그들은 훗날 자존심을 회복하고 세계무대에서 초강국의 위치를 되찾았을 때 유럽이 근대세계의 선봉이 되었는지 물어봤습니다. 

 역사학자 “니얼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가 첫 번째는 우수한 무기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정치제도 때문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수한 경제제도 때문인 줄 알았으나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문화적인데 있었습니다. 그 문화의 중심이 바로 기독교였던것입니다. 그 기독교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지속적이고 갱신되고 개혁된 결과였던 것입니다. 


3. 결론

 이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적으로 나라를 하나님의 풍요로 채우십니다. 그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8장38-39절에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서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사랑이 넘쳐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요4:20-26 


1. 서론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부르셔서 의롭게 하신 성도로 살아갑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오스기니스의 명저 “소명”에 마르틴 루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루터는 포괄적인 개혁의 비전이나 치밀한 계획 따위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문제를 놓고 고통스럽게 씨름하다가 그 자신도 당황 할 만큼 종교개혁의 고삐를 당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캄캄한 가운데서 중세 성당의 종탑계단을 고통스럽게 올라가서, 몸을 가누려고 밧줄을 잡는 순간 머리위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무심코 종을 치는 밧줄을 잡아당겨 온 동네를 깨우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찾고 그 길로 나아가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가 바로 서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려고 몸부림을 쳐야합니다.

2. 본론

 오늘 말씀은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 가운데 일어납니다. 물을 길으러온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마시기를 원했습니다. 이어 남편에 대한 말씀을 물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선지자”로 여깁니다. 그러면서 예배에 대한 문제를 물어보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디에서 예배들 드려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포로귀환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배척당하고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배드리는 것이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예배순서에 맡겨진 헌금이나 성가대와 같은 직분으로 예배에 봉사를 하게 됩니다. 이번에 수련회 때 찬양하는 찬양팀들은 참으로 훈련이 잘 되어있었습니다. 일사분란한 찬양준비와 기도 그리고 찬양도 미리 잘 연습하여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하지만 3주내내 다른 수련회까지 섬기며 찬양하는 찬양팀은 내적으로 갈증과 함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리더자나 기타 찬양팀의 마음에서 시작되어 외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서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자로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기에 준비하고 하나님과 충분히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오래전에 세워진 보수적인 교회를 젊은이들이 나오는 예배로, 교회를 짓지 않고 대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며 영향력을 끼치던 목사님이 한순간에 성추행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많은 사역에 쏟아내기만 하니 마음에 갈증이 생기고 그것을 인터넷으로 풀다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하는 말씀은 충분히 준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배를 준비하고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역에 쓰여지는 시간이 너무 과다하게 많아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3. 결론

 우리는 삶속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의 모본은 주일예배에서 배워야 합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그것으로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예배를 준비하며 충분히 사모하며 마음속에 기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일예배를 항상 사모하며 그 사모함으로 놀라운 은혜를 받는 주일예배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솔로몬의 기도

왕상8:22-30 

1. 서론

 시25: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다윗은 시편 25편 1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영어로 “25:1 To you, O LORD, I lift up my soul.” 이것은 “나의 영혼을 올려드립니다“라는 뜻입니. 우리는 찬양을 할 때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찬양이 드려지기를 원하며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솔로몬도 기도를 하며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대하 6장 13절에 보면 솔로몬은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손을 펴고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것과 겸손한 자세를 나타냅니다.

2. 본론
 기도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솔로몬의 기도를 살펴보며 우리의 기도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과 같은 기도입니다.
 첫 번째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세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제일 처음에 부르는 찬송은 “찬양과 경배”에 대한 찬송을 부릅니다. 이것은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기에 온전한 성도라며 “찬양과 감사로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의 자세는 우리의 죄악을 사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솔로몬은 “종과 주의 백성들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 주는 그 간구를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오순절강림 때 설교를 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선포합니다. 기도의 응답받는 방법이요 성 령충만한 방법이요 우리가 구원받는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기도는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선악의 판결부터 전쟁에 패하고 성전에서 회개할 때, 가뭄의 형벌을 당할 때 회개하며 기도를 응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간구해야 할 바를 정확히 알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는 자체 하나님의 약속하신 언약에 근거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다윗 왕에게 약속하신대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임하시며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여 주시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도를 들어주시기로 약속한 언약을 통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결론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와 이방인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임재하시기로 약속한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면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첫 번째는 경배하고, 두 번째는 회개하고, 세 번째는 구체적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언약의 결정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늘 우리에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하나님께 늘 간구하는 주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왕이 된 다윗

대상11:1-3

1.서론

 이 땅의 사회도 약속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발전되어 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버리시고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은 결국에는 왕이 됩니다.

 그동안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기어 도망 다닐 때만 해도 다윗이 왕이 되기는커녕 살아남기가 힘들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지 15년 만에 유대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 후 7년이 지나서 다윗은 유대와 이스라엘의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 됩니다.

2. 본문

 이같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드린 지 1000년이 지나서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1000년이 지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과 만납니다.

 가) 사울왕의 잘못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사울 왕이라면 죄를 짓고나서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버리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로 하셨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울처럼 하나님이 세우시기로 한 다윗을 죽이는데 총력을 기울어야 합니까? 우리는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위에 올리실 때까지 좋은 왕을 만들려고 다윗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면목이라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옆에 두고 읽으며 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나안땅을 정복하기 전 모세가 요단 앞 모압 평지에서 기록한 “신명기에 왕의 조건”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왕은 “평생에 자기 옆에 하나님이 말씀을 옆에 두고 읽어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모든 말씀을 행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사울왕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다윗을 죽이려고 15년을 쫓아다녔습니다.

 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에 1000년이 지난 후에 성취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그 약속위에 믿음으로 서 있는 성도들입니다. 이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과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헌신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인 “워너 메이커”는 어렵고 성공을 해서 백화점의 왕이라 부릅니다. 그는 많은 돈을 벌어서 선교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많이 지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중국에 헌금한 교회를 보러 중국에 갔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보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옆 밭에서 소가 밭을 쟁기로 갈고 있었는데 두 마리 소 중에 한 마리가 없고 대신 어떤 청년이 소를 대신해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해서 물어봤더니 그 청년은 교회를 지을 때 자신의 두 마리 중에 한 마리의 소를 드리고 대신해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이 청년을 미국으로 데려와 공부를 시켰습니다. 이분에 중국선교에 많은 사역을 감당하신 성문삼목사님입니다.

3. 결론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구원으르 받고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구원받는 성도는 “헌신된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천년이 지나도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십니다. 그것을 믿고 늘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약속하신 땅

수21:43-45

1. 서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선포하시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견고한 여리고성을 정복했지만 아간의 범죄로 훨씬 작은 아이성의 정복에 실패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도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이미 승리가 예견되어 있는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본론

 43절에서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하신 온 땅을 다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입니다. 헷세드의 사랑으로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입니다. 여호수아서는 24장으로 끝이 납니다. 오늘 본문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다주셨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미국의 개척기 때의 사람인 윌리엄 펜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다른 백인들과는 달리 인디언들을 존중해 주었으며, 늘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어느 날 인디언들이 그에게 농담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펜,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 땅을 모두 가져도 좋네. 하지만 하루 동안 걸어서 돌아오는 땅만 주는 걸세.” 
펜은 그들의 말을 믿고서 다음 날 해가 떠오르자마자 길을 떠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떨어지자 인디언들에게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여보게, 자네들 말대로 오늘 아침부터 걸어서 이제 돌아왔네. 약속대로 땅을 주게나.” 
 인디언들은 놀랐습니다. 농담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펜이 자신들의 말을 믿고 실행해 준 것이 놀랍고 한편으로는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인디언들은 약속대로 그가 걸어서 돌아온 땅을 그에게 떼어 주었습니다. 결국 그 땅으로 인해 윌리엄 펜은 펜실바니아의 창설자가 되었고, 오늘날 그 땅은 필라델피아 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무슨 약속이든 간에 그것을 제안한 자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믿음이 있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간의 약속도 이렇게 신실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켜지는데 하나님께서는 하신 약속은 분명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맹세하사 주리라고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다 주셨으므로”에서 “주셨으므로”라는 단어의 뜻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1)전쟁에 대한 의미로 - 쫓아내다(신11:23), 빼앗다(왕21:19), 차지하다
 2)법적의미로 - 상속하다(시25:13), 후사가 되다(창15:3), 기업을 얻다(사65:9) 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정복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었지만 믿음으로 전쟁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결론

가나안땅의 정복전쟁은 하나님의 약속하신대로 그 땅을 온전하게 다 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약속하신대로 믿음을 갖고 영적싸움에 임하면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많은 상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많은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44절에 “원수들 중에 이스라엘과 맞선자가 하나도 없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좋은땅열매교회 성도님들 삶속에서 믿음으로 나아가 날마다 승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시는 복된 성도님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긍휼에 의지한 기도

단9:16-19 

1. 서론

 다니엘하면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하나도 다치지 않고,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졌으나 타서 죽지 않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서 자주 들어온 말씀입니다. 이는 주제가 믿음의 사람 다니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학습법의 저자 김동환목사는 “제가 공부하는데 은사가 있다면 그것은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암송하며, 공부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기도와 말씀에 기초한 신앙과 생활훈련을 하셨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비결이라면 다른 것이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2. 본론

 오늘은 기도의 세 번째 시간으로 기도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기도하라”입니다. 본문말씀 18절에 보면 다니엘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가 무엇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하여 넘어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는 기도하는 자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하면서 “우리가 어떤 것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종일수록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때 더욱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만식장로님은 주기철목사님과 사제지간이었습니다. 조만식장로님은 주기철목사님을 오산학교교장으로 있으면서 가르쳤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주기철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장로로 시무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어느 주일아침에 예배시간에 손님과 이야기하다가 예배시간에 늦게 교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주기철목사님이 전도사시절이었는데,  주전도사님은 “조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마시오”하고 호령을 했습다고 합니다. 이때 못된 장로 같으면 그냥 나가든가 그렇지 않으면 의자에 그냥 앉겠지만 조만식장로님은 서서예배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조장로님 기도하십시오”라고 주전도사가 말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만나는 것보다 사람만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라고 회개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다니엘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한 기도는 먼저 다니엘의 회개기도가 주를 이루를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기도를 하고 하나님이 용서를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곧바로 응답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백성을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지만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죄는 항상 징계를 받아야 할 죄지만 하나님께서 70년 기한을 약속하신 그 약속을 위해서 긍휼 가운데 기도하는 것입니다.

3. 결론

 이사야 59장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을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참된 기도를 드리는 성도가 됩시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철저하게 회개하는 회개기도를 먼저 해야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다면 하나님의 긍휼의 기도는 성도의 응답받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늘 응답받는 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기쁨과 믿음을 소유하시는 성도들이 다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

엡5:1-14 


1.서론

 최근 기아자동차의 카니발을 구매했습니다. 구매하고 나니 포인트를 30만점이나 주었습니다. 그 포인트로 “스타일 케어서비스”에 가입했습니다. 스타일 케어는 자동차가 1년 안에 운전자가 잘못해서 차가 손상을 입었을 때에 200만원까지 무상수리를 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그 서비스를 가입하고도 포인트가 10만점이나 남았습니다. 이것으로는 오일을 교환하거나 그 밖에 정비를 할 때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아자동차의 멤버십입니다. 

하지만 우리 좋은땅열매교회의 성도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천국의 시민권은 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멤버십입니다.

2. 본론

 사도바울은 하늘의 시민권을 받고나서 “자신이 알던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천국의 시민권자인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살 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천국의 시민권자인 성도가 하나님을 본받는 삶은 두 가지로 생각 볼 수 있습니다.

 가) 어두움에 속한 일을 버려야 합니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어둠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을 버리고 멀리 산속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의 어둠에서 살아가면서 그들에게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이들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과 함께 살아갑니다.

 본문에서는 그런 것들은 “너희 중에 이름이라도”부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어둠의 일들 뒤에는 탐욕이 있고 그 뒤에 우상숭배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은 너희들의 인생이고 너의 인생을 즐겨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죄에 빠져가는 삶뿐입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에서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철학은 논리적이고 완벽해보이지만 이것은 하나님말씀에 비유하면 초등학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한 기초단계인 것입니다. 더구나 속이는 일에는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꾐에 빠져서 인생을 허비하고 징계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어두움에서 헤매다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나) 빛의 열매를 맺으라

 천국시민의 삶은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전에는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어두움에 거했지만 이제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빛이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움에 참여하지 않을 뿐아니라 도리어 그 어두움에 일을 책망합니다. 우리는 빛된 성도로 살아가며 이 어두움을 밝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두움에 속한 사람은 아무리 밝게 만들려 해도 밝아질 수 없습니다. 어두움이 모이면 더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과 같은 성도들이 이 땅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백성들인 성도가 어두운 부분을 빛으로 밝힐 때 사회의 어두움인 불의, 불공평함, 잔인함, 착취가 사라지게 됩니다.

 히브리인들의 속담에 “하나님을 웃게 만들려면 고아와 과부를 웃게 만들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열매를 맺을 때 이 땅은 빛으로 채워져 갈 것입니다.

3. 결론 

 공자가 재자들을 불러놓고 “이 짧은 세상에서 가장 만족도가 높은 일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건강, 친구, 화목한 가정을 이야기 했지만 공자는 너희는 세상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밖에 못하냐고 말하면서 “먼저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기꺼이 따르고자하는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빛 된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도의 삶을 따라오는 빛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엡4:1-6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

1. 서론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요즘같이 다양성과 개인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는 더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관계가 자신의 특별한 사람들로 범위가 좁아집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에게 팔로워를 받는 사람을 “인싸”라고 합니다. 인싸이더의(내부자, 멤버) 준말이지만 그 의미 속에는 “잘 놀고 잘 어울리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중에 정말 잘 놀고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앞에 “핵”이라는 접두어를 붙여서 “핵인싸”라고 부릅니다.

 요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핵인싸“”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한분이시오 하나님도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교회 안에서 일치는 우리 신앙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본문

 만장일치라는 것은 “그 회의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뜻이 모두 일치”한 것을 말합니다.. 요즘은 만장일치라는 것은 자유가 없지 않으면 몰라도 좀처럼 일치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만장일치의 의결이 나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1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회의에서 보고했습니다. 사도들은 이 전도여행에서 일어나 기적과 표적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 것을 알았고 그들은 파격적으로 이방인 전도를 위한 선교사로 파송하는데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오늘 본문말씀은 에베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됨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담을 허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담이 원죄를 지음으로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 되었고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과 뜻을 합하여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것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란?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의 삶은 오래 참음도 있어야 하고 사랑으로 서로 용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통하여 화평한 삶을 주십니다.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은 교회에서 직분에서도 동일합니다. 우선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직분이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차별이 없으나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목사나 장로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직분이라는 의미에서는 집사나 장로나 주방 봉사하는 분들의 그 가치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에도 은혜의 분량대로 주십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달란트비유에서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그 달란트는 다섯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받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받은 직분에서 충성을 다해야 하고 삶에서도 성도로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 충성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만큼 충만한데 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3. 결론

 바둑에서 아마1단과 프로1단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나타냅니다. 프로9단이 되면 “입신”이라고 부릅니다.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아마1단에 비해서 프로1단은 어마어마하게 바둑을 잘 두는 것이지만 프로1단은 수졸이라고 부릅니다. 겨우 졸렬함을 지키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면서 말입니다. 이 일은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에 가능해집니다. 교회가 일치하면 성장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화평에 따라 하나가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